차(茶) 무역과 도자기 역사

 차 무역과 자기 제품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놀랄 필요는 없다. 차 무역은 유럽의 자기 제품에 심오하고도 복잡한 영향을 미쳤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자기의 발전이 차 소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찻잔과 찻주전자보다는 화물 수송 및 교역상의 필요 조건과 선체의 균형 유지와 더 큰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자기라는 뜻의 포슬린(Porcelain)은 이탈리아어인 포르셀라노(Porcellano)에서 나온 말이며, 문자 그대로는 '새끼돼지'라는 뜻을 갖고 있다. '포르셀라노'는 지중해 연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패(紫貝)의 모양을 묘사한 말이다. 자기가 자패의 섬세하고 매끄러운 반투명 표면과 닮았다 하여 이와 같은 이름을 붙인 것이다. 자기는 유럽인들이 알기 전에 이미 페르시아, 아랍, 동남아시아, 터키로 수출되고 있었다. 자기의 모조품 제작 시도는 르네상스 초기 이탈리아에서 최초로 행해졌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자기가 아니라 파양스 도자기(광택이 나는 고급 채색의 도자기)나 마욜리카 도자기(이탈리아산 장식 칠보도자기)였다. 제품에 실리카, 알루미나, 석회, 마그네슘, 산화철, 산화 탄소가 다양한 비율로 섞였기 때문이다. 18세기 이전 유럽에서 제작된 도기에는 진짜 자기를 만드는 데 쓰이는 재료인 카올린(고령토)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현재 고령토는 영국의 콘월에도 상당량이 매장되어 있지만, 1750년 이전에는 카올린이 콘월에 있다는 사실조차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포르투갈 이후 중국과의 무역을 주도했던 유럽 세력은 네덜란드, 영국으로 바뀌었으나, 중국에서 주로 수입하는 상품은 차와 비단이었다. 그런데 이들 둘은 물에 민감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물에 민감하다는 단점 때문에, 차와 비단은 바닥의 물에 젖지 않고 응결되거나 비에 젖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배 중앙에 실어야 했다. 그런데 배의 중앙에 실어 버리면 항해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밸러스트다.


 선체의 균형을 유지하고 배가 순조롭게 항해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게는 배의 절반이지만 부피는 그보다 훨씬 적으며 내수성이 있는 무거운 상품이나 밸러스트(선체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배의 바닥에 싣는 석탄, 돌, 쇠 등)를 배 밑 만곡부에 실어야 했다. 밸러스트 역할을 하는 용골(큰 배 밑바닥의 한가운데 위치를 받치는 길고 큰 목재. 이물에서 고물에 걸쳐 선체를 지지한다)을 영구적으로 배 밑바닥이나 바깥쪽에 싣고 다닐 수도 있었지만, 이처럼 영구적인 밸러스트는 이득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무거운 짐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보다 훨씬 더 좋은 방법은 교역을 할 수 있는 무거운 상품을 찾는 일이었다. 차와 비단 때문에, 중국에서의 밸러스트 문제는 다른 곳에서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선박들은 수은과,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8세기까지 유럽인들이 전혀 만들 줄 몰랐던 자기를 배 바닥에 밸러스트로 실은 채 차를 담아 돌아왔다. 차의 총수입량 중 4분의1 가량은 18세기에 '켄틀리지'라고 불렀던 무거운 밸러스트용 쇳덩이와 거의 맞먹었다. 그리고 입수된 선박항해 기록에 의하면 전체 켄틀리지의 4분의1은 자기였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차 1백톤 당 6% 무게에 이르는 자기가 유럽으로 수입된 것이다. 18세기 들어 해마다 평균 4천 톤의 차가 영국으로 수입되었다면 240톤 가량의 자기도 함께 들어왔을 것이다.



 이 거대한 양의 자기는 종종 화물 관리인들-동인도회사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독자적인 무역업자이기도 했다-의 손에 넘어가 그때마다 아무렇게나 다루어졌다. 그들은 단지 무거운 물건, 특히 채워 넣기 쉬운 작은 쟁반 / 컵 / 접시 등이 필요했던 것이다. 화물 관리인이 하는 일은 화물 톤수가 맞는지 감독하는 것이었다. 톤수 조정작업은 매우 번거로워서 조정 과정에서는 늘 부정이 뒤따랐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 주문하면 프랑스에서 양식이 작성되고 명세서는 네덜란드에서 작성되는 식이었다. 그러니 광동에 있는 공행은 최대한 낮은 가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예컨대 1712년에는 216개의 정찬용 식기 세트에 5파운드 10실링을, 1730년에 200인용 차 세트에 7파운드 7실링을 받았으며, 각 세트마다 그것을 주문한 대사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1732년 5천개의 찻주전자가 개당 1.5펜스에 수입되기도 했다. 차이나는 품질이 좋았으며 게다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값이 저렴했다.

 18세기에 자기로 된 찻잔의 무게는 2온스 미만이었으며 정찬용 접시는 8온스 이하였다. 찻잔과 접시의 평균 무게가 4온스이고 240톤이 수입되었다면, 매년 평균 5백만 개 이상의 찻잔과 접시가 유럽으로 수입된 셈이다. 이와 같은 양이 실제로 주문되었는지는 동인도 회사 선박의 기록으로 새삼 확인된다. 이 기록에 의하면 1718년에는 20톤 분량의 찻잔과 접시 25만개(개당 평균 2.8온스)가 주문되었고, 1724년에는 40톤 분량의 찻잔과 접시 33만2천개(개당 평균 4.3온스)가 주문되었다. 1732년에는 18톤 분량, 즉 17만 8천개의 찻잔과 접시(개당 평균 3.6온스)가 주문되었다.

 

 찻주전자와 찻잔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다. 인도인, 아라비아인, 터키인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인 역시 주전자가 없었으며, 차를 끓일 때는 탕관을 사용했다. 은이나 기타 금속으로 만든 영국 초기의 찻주전자도 탕관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차를 끓일 때는 설탕이나 다른 풀잎 등을 섞었다. 

 1720년 이전에 유럽에는 끓이거나 뜨거운 물이 닿아도 변하지 않는 세라믹 단지를 만들 수 있는 공장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중국의 아름다운 포도주병을 본 몇몇 기업가들이 그 모양을 본따 유럽에서 찻주전자로 만들어 팔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그러니 사실상 찻주전자는 외국에서 발명된 것으로 정작 중국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던 물건이다. 손잡이가 달린 찻잔 역시 유럽인들에 의해 개발된 것이다. 중국인들은 차를 마실 때 우유를 사용하지 않을 뿐더러 손잡이를 사용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충분히 식혀서 마셨다. 따라서 그들이 사용하는 찻잔에는 손잡이가 달려 있지 않았다. 중국의 최고급 차는 혈액(평균 섭씨 37도)보다 약간 높은 온도일 때 가장 좋은 맛을 내기 때문에 너무 뜨겁게 해서 마시면 오히려 맛이 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중국 차는 컵에 손잡이가 필요할 정도로 높은 온도에서 마시면 안된다. 

 손잡이가 없는 컵은 손잡이가 달린 컵보다 적재하기 쉬웠다. 굳이 손잡이를 달아야 할 겨우 마시기 쉽게 만들기보다는 적재하기 쉽도록 설계하곤 했다. 그래서 초기의 찻잔은 능률적으로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이 컵들은 영국에서 설계되어 중국에서 제작되었는데, 도자기 제조업에서 중국 스타일을 모방하게 된 후에는 손잡이가 없는 컵이 유럽에서 제작되었다. 1750년 이후에는 중국에서 제작된 컵에 특별히 손잡이가 부착되었으며, 손잡이를 제조하는 직업은 유럽의 대도시에서 인정받는 직종이었다. 

 1770년 유럽에서 사용된 컵의 절반 가량은 손잡이가 달려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달려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럽인들은 왜 컵에 손잡이를 부착하게 되었을까? 18세기 유럽인들은 일본인처럼, 그러나 중국인들이나 러시아인들과는 달리 차를 만드는 과정을 일종의 의식으로 간주했다. 차에는 끓는 물(너무 오래 끓이지는 않은)이 사용되었으며 그 과정에서도 조그만 의식이 따랐다. 차를 넣고 우유를 넣는지, 차를 넣기 전에 우유를 넣는지 여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18세기에 나온 설탕은 다소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컵에 차를 넣기 전에 먼저 설탕을 집어넣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녹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에서는 차를 마실 때 표면을 불어서 코로 냄새를 맡는 것으로 찬탄을 표시했다. 이러한 행동을 이해하기는 다소 어렵지만 차 온도를 식히기 위해서 그런 것이므로 그리 이상할 것은 없다. 민족이 다 다르듯 차를 마시는 방법도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다. 18세기 말 유럽으로 제작된 자기의 무역이 끝나가자 무역업자들은 밸러스트로 사용할 다른 것을 서둘러 찾아야 했다. 앞서 말했듯이 광동에서는 자기가 말도 안될 만큼 낮은 가격으로 판매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낮은 가격으로도 중국인들이 서양에 자기를 수출하기란 매우 힘들었다. 유럽 국가들이 자국 제조업자들의 간절한 부탁에 따라 중국 자기의 유입을 어렵게 만들었던 것이 그 이유이다.

 

 전통적인 중국 자기는 1번 불에 구운 경질 자기로 고온(1400도)의 도자기이다. 반면에 저온(1250도)의 초기 유럽산 자기는 불에 2번 구운 연질 자기로 되어 있다. 중국의 자기는 유럽산보다 값이 저렴하고 질도 더 좋았다. 또한 중국산 도자기는 튼튼하고 유리 모양으로 되어 있었으나, 유럽산 자기는 종종 모양이 일그러진 불완전한 제품이 많아서 매매시 거절당하기도 했다. 유럽산 도자기의 유약에는 작은 기공이 많거나 혹은 부분적인 기공이 있었다. 게다가 과립상으로 이루어져 있어 안정성면에서도 중국산보다 뒤떨어졌다. 

 그러나 1760년 이후 유럽인, 특히 영국인들은 자국 내에서 무겁고 조잡하며 수명도 짧지만 단 하나의 장점인 가격, 즉 중국산 도자기보다 훨씬더 저렴한 식기를 개발해냈다. 그리하여 공행의 상인들에게는 팔다 남은 진짜 도자기 재고가 엄청나게 쌓이게 되었다.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1791년 공식적인 수입을 중단하기로 결정했을 때, 광동에 있는 한 상인은 창고에 1200만 개의 도자기 재고를 갖고 있었다. 런던에 있는 동인도 회사는 이미 1780년에 도자기 재고품이 너무 많다는 사실에 불만을 터뜨렸다. 차를 수입할 때 항해사들에 의해 비공식적으로 밸러스트 역할을 하는 도자기도 함께 수입되어, 수백만 개의 도자기가 원가 이하로 팔렸고 할인판매도 번번이 행해졌기 때문이다. 

 차의 독점 판매가 시작되었던 1684년부터 도자기 수입을 중단하기로 결정한 1791년까지 107년간 영국 동인도 회사가 수입한 차는 모두 40만 톤이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밸러스트로서 수입된 자기는 2만4천톤에 달했다. 이는 1개당 평균 4온스로 잡을 때 중국산 자기 2억1,500만 개에 해당하는 양이다. 이 숫자는 얼핏 대단히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무렵 10세 이상의 영국인 1명당 5개꼴에 지나지 않는 양이다. 물론 당시만 해도 자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겠지만 어쨌든 18세기에 자기를 사용한 사람이라면 대부분 중국산 자기를 사용했을 것이다. 왜냐고? 값이 쌌으니까.
 

 요컨대 차 무역은 역사상 아주 짧은 기간 내에 영국 중산층의 생활을 최고 수준으로 높이는 데 일조했다. 물론 차 무역이 미친 영향은 이보다 훨씬 더 많다. 예를 들어 버들무늬(영국 도자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국풍의 흰 바탕에 남빛이 가미된 디자인)는 영국인이 중국 풍광을 보고 느낀 아이디어를 중국화한 것에서 유래, 추후 영국에 정착된 것이다. 중국의 이미지는 영국화되었고, 유럽의 풍광은 중국화되었다. 쉰느와저리(chinoiserie)는 중국 디자인을 본따 유럽의 가구, 장식, 직물에 도입된 개념으로서 차 무역에 힘입어 한때 크게 유행했다. 

 1709년~1742년 드디어 마이센이나 첼시 등 유럽의 도시에서 도자기 제조 비법을 알아냈다. 이는 중국산 수입품과 겨루고자 하는 염원이 직접적으로 빚어낸 결과였으나, 정작 그 비법을 이용해서 생산된 것은 중국산과는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로운 제품이었다. 일본, 안남에 대한 유럽의 첫인상도 이들 세 나라로부터 도자기를 수입하는 과정에서 각인된 것이었다. 당시 이들 세 나라의 도자기 품질은 중국보다는 덜했지만 유럽보다는 좋았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재빨리 자신들에 맞게 공정 비용을 줄였으며 제품을 개량해 나갔다. 그러나 1800년에 유럽의 도기 산업 중 자기와 관련된 생산량은 5%에 지나지 안았다. 나머지는 전부 조잡하고 무거운 토기였다. 이는 1750년 이래 50년 동안 도기 산업이 오히려 퇴보해 왔음을 드러낸다. 무거운 토기 제품이 대량 생산되기 전에 유럽의 중산층은 비교적 부유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가장 훌륭한 자기에 차를 따라마셨다. 부엌에서 쓰이는 용도로는 토기가 양철, 백랍, 목재로 만든 제품보다는 개선된 것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빅토리아 시대의 거실에서 사용하는 제품으로는 확실히 퇴보한 것이었다.   


덧글

  • 迪倫 2010/01/23 21:15 # 답글

    오랜만의 포스팅 반갑습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자세한 얘기들이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명청의 경덕진에서는 중국에서는 쓰지않는 유럽인들만 좋아해서 주문하는 파란색 도료를 귀면청이라고 불렀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18세기 이미 값싼 중국산이라는 것 보면 역시 세계의 하청공장인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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